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40주년, 124위 시복 10주년 기념 특별전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40주년, 124위 시복 10주년 기념 특별전
새벽빛을 여는 사람들
한국천주교회의 여명기에는 조선 시대 성리학적 신분 질서와 불평등을 거부하고, 인간 존엄과 평등, 이웃 사랑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정으로부터 사학邪學의 죄수로 낙인찍혀 온갖 천대와 핍박을 받았고 결국에는 목숨까지 내놓았다. 이들은 단순한 종교나 학문적 경향을 넘어 조선 후기 정치,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는 큰 흐름의 하나가 되었고 후일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침내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자 중 124명을 복자福者로 선포했다. 광화문 광장, 조선 시대 가장 오래된 왕궁인 경복궁 앞에서 이루어진 시복은 대역 죄인으로 삶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순교자들의 신원을 복원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경험한 세 번의 시복식諡福式(1925, 1968, 2014)과 한 번의 시성식諡聖式(1984)은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고 사회의 불평등을 제거하여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역사의 한 장면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자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를 이미 이루어진 사회로 만든 ‘새벽빛을 여는 사람들’이었다.
한 나라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 사회, 문화, 종교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전시가 한국 근현대사 100년 안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시복·시성식의 의미를 바라보고, 역사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1925년 7월 5일
한국 순교자 79위 순교자 시복식
이날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복자로 선포된 이들은 기해년(1839)과 병오년(1846)에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고 끝내 순교한 사람들이었다.
유학 외에는 모두 사학(邪學)으로 간주했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는 아비도 임금도 모르는 사교이며, 이를 믿는 이들은 삼강오륜을 저버린 짐승보다 못한 자들로 취급받았다. 인간 평등을 실현하고 신앙의 자유 안에 살고자 했던 그들의 열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습의 벽에 갇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박해하며 억눌러 없애려 하니, 죄인의 굴레를 쓰고 갇히는 천주교인이 넘쳐나 옥사가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기해년의 전국적인 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를 포함한 많은 천주교인이 희생되었고, 병오년에는 첫 한국인 사제마저 25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순교자들이 칼날 앞에 선 순간까지도 지키고자 했던 신념은 후손들에게 사그라지지 않는 불씨를 남겼다. 조선이 막을 내리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여전한 종교 억압과 분열의 정책 속에서도 천주교인들은 흔들림 없는 믿음의 공동체를 지켰다.
1925년 7월 5일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이 복자로 선포되던 순간 세계 교회는 한국을 주목하였다. 이역만리에서 열린 시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 교회에서 참석한 이는 단 5명뿐이었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박해 앞에서도 끝내 믿음을 지켜낸 순교자들의 존재는 나라 잃은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 주었다.
주요 콘텐츠
79위 복자화 - 쥬스타니안(Giustanian), 1925, 명동성당 제공
천주교순교자표창식 - 1925.3.19., 동아일보 제공
교황청에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을 결정하였고, 곧 시복식을 개최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시복식을 ‘표창식’이라고 표현하였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시복식 - 1925.7.5.,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제공
1968년 10월 6일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19세기 중반, 제국주의 열강의 기세가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은 폐쇄적인 대외 정책을 고수했다. 프랑스가 병인양요(1866)를, 미국이 신미양요(1871)를 일으켰을 때, 조정(朝廷)은 천주교인들에게 외세와 손을 잡으려 했다는 반역의 죄목을 씌웠고, 나라의 빗장을 더 굳게 걸어 잠갔다. 병인년(1866)에 시작된 박해는 흥선 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까지 장장 8년간 전국에서 이어졌다. 리델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길고 극심했던 박해로 적어도 8천여 명의 천주교인이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청 성가대의 아름다운 소리로 우리말 성가 “복자찬가(福者讚歌, 1984년 순교자찬가로 성가명 변경)”가 울려 퍼졌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들이 복자로 선포된 자리였다.
5개 언어로 세계 각국에 중계된 시복식은 일제의 강점으로 억압받고,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 대한민국의 새로운 자부심이 되었다. 한국천주교회와 그 역사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은 높아져만 갔다. 우리 사회는 이 시복식을 지켜보며 ‘순교’가 ‘옳은 것을 지키고 실천하고자 하는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이해하며 본받을 가치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주요 콘텐츠
영광 - 정창섭, 캔버스에 유채, 1968,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제공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을 맞이하여 그들을 기억하고 순교 정신을 전하고자 제작되었다.
병인순교자 24위 시복식 영상 - 1968, 3분 5초, AP통신 제공
시복식 참가 기념 사진집 - 백남식, 1968,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시복식에 참가했던 한국 순례단 일행의 여정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김수환 대주교, 한국의 첫 추기경으로 서임 - 1969.3.28.,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제공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행사 및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식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한국 순교자를 성인으로 판정하고 결정하여 성인들 명부에 올리노라.”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복자 103위가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지난 1925년과 1968년 시복된 복자가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 교회의 공경을 받는 성인이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방한 전 담화문에서 한반도 겨레의 아픔과 희망을 같이하며, 하루빨리 모두가 평화롭게 하나의 화목한 가족이 되어 복되게 살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하였다. 또한 불화로 많은 고통을 받아온 여러분의 나라가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인류의 상징이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교황의 행보는 우리 사회에 위로가 필요한 곳을 향했다. 소록도의 나환자들과 5·18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와 유가족을 찾아 위로하며 ‘화해의 날’ 미사를 집전하였다. 부산에서는 노동자들을 만나 인간 존엄과 노동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웠다.
타협할 수 없는 진리 앞에 목숨마저 내놓았던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삶과 평화의 사도가 된 교황이 몸소 보여 준 메시지는 우리 사회를 넘어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다시금 되새기고, 실천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시성식과 교황의 방한은 우리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창립 200년 만에 한국 교회에 처음으로 성인이 탄생하였고, 아비뇽 교황 시대 이후 처음으로 로마 밖에서 시성식이 이루어졌다. 국내에서 단일 종교 행사로 이처럼 많은 인원이 모인 것 또한 처음이었다.
주요 콘텐츠
103위 성인화 - 문학진, 캔버스에 유채, 1977, 혜화동성당 소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제공
‘103위 순교복자화’로 제작되었으나 1984년 시성식 이후 현 제목으로 변경되었다. 막연한 상상 속에 있던 순교자들의 모습을 각각의 사연을 바탕으로 기물과 함께 가시적으로 그려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 - 1980.12.11.,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제공
5·18민주화운동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의 감형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교황은 ‘인도적 고려와 자비 정신’을 바탕으로 대통령의 관용을 청하였다.
한국 주교들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보낸 서한 - 1982.5.27.,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소장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의 방한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황의 방한과 시성식이 남긴 것 - 1984.12.25., 가톨릭신문 제공
한국천주교회가 나눔의 실천으로 시작한 ‘무료 개안 수술’ 사업이 전국 11개 병원에서 시행되었다. “이 땅에 빛을”이라는 200주년 슬로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업이 되었다. 이후 1986년 3개년 계획으로 전국 12개 병원에서 시행하였다.
교황의 방한과 시성식이 남긴 것 - 포항예수성심시녀회 제공
교황 방한을 계기로 포항예수성심시녀회에서는 정신 지체 어린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지원하기 위해 “요한 바오로 2세 어린이집”을 개원하였다.
2014년 8월 16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 아시아 국가 중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제6회 가톨릭아시아청년대회(AYD)에 참석하고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을 주례하기 위해서였다.
교황 방한 전에 한국천주교회 내부에서 시복식 장소를 결정하는 데에만 석 달이 걸렸다. 여러 장소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서울 광화문 광장이 선택된 것은 조선 시대 가장 오래된 왕궁인 경복궁 앞에서 순교자들의 시복을 선언하는 일이 그 신원을 복원하는 의미가 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2014년 8월 16일 복자에 오른 순교자들은 200여 년 전 선교사 없이 이 땅에 한국천주교회를 직접 세운 사람들이었다. 첫 순교자 윤지충과 남성 중심 사회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었던 여성 회장 강완숙,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백정 황일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신분 사회의 사슬을 끊고 인간 존엄과 평등, 이웃 사랑의 정신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날 광화문 광장은 역사적 순간을 함께하고자 하는 인파들로 넘쳐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이웃, 더 나아가 전 세계 보편 교회에까지 빛을 전하고,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등불이 되기를 당부했다. 남과 북의 평화와 일치를 기원했고, 세월호 유가족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밀양 송전탑 관련 주민들과 음성 꽃동네 장애인 등 가난한 자와 약자를 위로하였다.
마지막까지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우리가 순교자들이 보여준 용기와 자애를 자양분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주요 콘텐츠
124위 복자화, 새벽빛을 여는 사람들- 김형주, 201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제공
시복식 당일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 선언 직후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 2014.8.16., 천주교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 제공
광화문 광장에 시복식 기념 바닥돌 설치 - 2015.8.23., 경향신문 제공
시복식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1주년을 기념하여 광화문 광장에 기념 바닥돌을 설치하였다. 우리 현대사의 한 사건을 기억하고 순교자들의 굳은 신념을 떠올릴 수 있는 작은 표석이 될 것이다.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바라며 보낸 프란치스코 교황의 특별 메시지
남북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4월 25일 오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 알현에서 발표한 메시지이다. 교황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한국인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에필로그
한국천주교회는 2014년 시복식 이후로도 꾸준히 사료를 수집하여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베네딕도회 덕원의 순교자’ 38위, 가경자 최양업 신부 등 총 253위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서울대교구는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11대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한국 순교복자 가족 수도회 설립자 방유룡 신부의 시복 추진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